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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6-04 17:08
[법보신문] 8. 개혁세력의 성장 - ① 실천불교전국승가회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525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1062 [639]
 
▲ 실천승가회는 1994년 3월16일 ‘종단개혁에 관한 불교대중 의식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의현 총무원장의 퇴진과 제도개혁을 요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왼쪽부터) 법안·효림·지선·청화 스님 등이 참석했다. 실천승가회 제공

 

“실천불교전국승가회(실천승가회)의 창립은 종단개혁을 외면하고 더 이상 통일운동과 사회민주화운동에만 전념할 수 없다는 시대적 인식에서 비롯됐다.”(김봉준, ‘94년 불교개혁운동의 반성적 점검’, 불교평론 8호)
 

1970~80년대를 숨 가쁘게 달려온 사회 민주화 세력들은 1990년대 들어 변화를 고민했다. 1987년 ‘6·10민주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라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끌어 냈고, 1992년 문민정부의 탄생으로 사회민주화가 어느 정도 실현됐다는 판단에서였다. 민주화 세력들이 인권과 복지 분야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이런 배경이었다.
 
이 무렵 불교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0년대부터 ‘민중불교론’을 바탕으로 사회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불교계 민주세력들은 사회민주화가 진전되자 종단 내부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시기 종단내부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잔재했다. 의현 총무원장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의 정권예속화와 권력독점은 종단이 풀어야 할 현안 가운데 하나였다.
 
변화는 ‘불교정토구현 전국승가회(정토승가회)’가 이끌었다. 정토승가회는 1986년 젊은 스님들이 중심이 돼 출범한 불교계 대표적 진보단체였다. ‘불교의 역사화·대중화·실천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불교자주화와 사회민주화를 선도했다. ‘6·10민주항쟁’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해 불교계가 사회민주화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민주화의 중심에 섰던 정토승가회가 종단개혁을 새로운 운동방향으로 설정한 것도 1990년대 초이다. 종단 내부의 구조적 모순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정토승가회가 추구하는 민중불교를 실현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개혁세력 민주화 정착되자
종단 내부 문제 관심 가져
정치예속·권력독점 등 문제
민중불교실현 위해 개혁착수

정토·대승승가회 등 통합으로
1992년 10월1일 공식 발족
겸직금지·종회의원 직선제 등
개혁 입법 중앙종회에 청원

수차례 개정 요구 무시되자
종권 퇴진 운동으로 전환
승가단체 등과 범종추 결성
의현 스님 퇴진으로 이끌어

그러나 종단 내부 문제에 대한 정토승가회의 큰 관심은 집권세력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이들은 변화와 개혁요구를 종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했다.
 
정토승가회 상임고문이었던 지선 스님은 “종단 기득권층 스님들은 관변단체들을 동원해 승가회 소속 스님들을 ‘빨갱이’로 취급했다. 심지어 함께 사회운동을 했던 스님들조차 ‘좌파’로 내몰았다”고 회고했다. 비판과 견제가 커질수록 정토승가회의 종단개혁에 대한 열망은 더욱 높아갔다.
 
정토승가회가 우선적으로 추진한 것은 종단 진보세력의 결집이었다. 동국대와 중앙승가대 출신의 젊은 스님들을 규합했고, 그동안 정토승가회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던 대승불교승가회(대승승가회)측 스님들과도 모임을 가졌다. 1988년 3월 창립한 대승승가회 역시 불교개혁과 사회참여에 대한 강한 의지로 출범한 승가단체였다. 다만 정토승가회가 추구하는 운동노선과는 달랐다. 정토승가회가 직접적인 사회참여를 추구했다면 대승승가회는 이를 비판하며 승려의 위상에 맞는 대중적 운동을 펼쳤다. 인권과 통일, 노동, 환경문제, 민족문화 등에 대한 부분별 활동에 역점을 두고 불교적 논리와 대중정서에 맞는 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대승승가회는 본격적인 활동을 해보기도 전에 1988년 6월 봉은사 폭력사태로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봉은사 폭력사태는 종권을 두고 당시 총무원 측과 봉은사 측이 벌인 갈등으로 10여명의 스님이 크게 다친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대승승가회 일부 스님들이 사건에 연루되면서 종단 안팎에서 적지 않은 비판이 쏟아졌다. 결국 대승승가회는 이 사건으로 사실상 와해 수순을 밟고 있었다. 정토승가회 일부 스님들이 대승승가회와의 통합논의에 반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정토승가회와 대승승가회 통합 준비위원을 맡았던 일문 스님은 “정토승가회 내부에서 대승승가회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었다”며 “자칫 정토승가회가 추구했던 민중불교운동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종단개혁은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정토승가회는 내부적 논의를 통해 1992년 7월30일 ‘발전적 해체’를 선언하고 진보세력의 통합을 추진했다. 양측은 4월7일부터 9월29일까지 총 11회의 준비모임을 갖고 승가운동의 단일기구를 발족시키기로 합의했다. 1992년 10월1일 실천승가회는 이런 산고 끝에 공식 출범했다. 초대의장은 청화 스님이 맡았고 지선·종림·진철·지명·지원·현각·송산·진관·여연·성연·종태·효림·현응·법안·일문·현기·지홍·법연 스님 등 150여명이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실천승가회는 창립선언문에서 “종단개혁을 논의하기에 앞서 개혁의 주체세력을 만들어 가는데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그동안 종단개혁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진행됐음에도 실현되지 못한 이유가 개혁을 이끌 주체세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반성적 의미였다. 실천승가회가 ‘종단개혁의 대중적 지지’와 ‘개혁주체세력 형성’을 운동의 목표로 설정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실천승가회는 출범과 동시에 10월19일 세미나를 열고 종단개혁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를 넓혀 나갔다. 이날 세미나에서 종단개혁위원장 효림 스님은 △본사주지와 종회의원 겸직 금지 △중앙권력의 지방분산 △종회의원 선출 직선제 등을 주장하며 종단개혁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종단 내부의 반응은 냉랭했다. 오히려 종단 집권층은 “운동권 출신 스님들의 급진적 개혁 방안”이라고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분위기였다.
 
실천승가회는 1993년 3월9일 ‘중앙종회의원 선출 직선제’와 ‘종회의원 본말사주지 겸직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종헌종법개정안을 중앙종회에 공개 청원했다. “중앙종회가 이를 채택하지 않을 경우 서명운동과 공청회, 세미나 등을 열겠다”고 압박했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당시 기득권층으로 분류되던 중앙종회의원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다. 총무원장이 본사주지를 임명하고, 본사주지가 다시 당연직 중앙종회의원에 선출되는 종단권력 구조의 틀을 완전히 깨는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종단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는 종단개혁의 여론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중앙종회가 3월11일 열린 제108차 임시회에서 실천승가회의 청원을 정식 안건으로 채택하되, 논의는 차기회의로 이월한 것도 이런 고민이 담겨 있었다.

중앙종회에서 종헌종법개정안이 이월되자, 실천승가회는 즉각 반발했다. 예고했던 대로 3월12일 ‘종헌종법개정을 위한 2000명 서명운동’에 착수할 것을 선포했다. 이를 위해 전국 시도를 8개 구역으로 나눠 서명 문안을 우편발송하고 개별 면담을 통해 종단개혁에 대한 대중적 여론을 끌어 모았다. 그해 10월 실천승가회는 7개월여 만에 2000여명의 스님들로부터 종헌개정에 동의하는 서명을 만들어냈다. 11월 정기중앙종회에 이를 제출하고 종헌종법 개정을 재차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실천승가회 대표단은 의현 총무원장을 만나 종헌종법 개정에 힘써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현 스님은 이를 끝내 거부했다.
 
당시 실천승가회 사무처장이었던 법안 스님은 “실천승가회는 제도혁신을 통한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종권을 새롭게 창출한다는 것은 애초 계획에 없었고 역량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의현 스님을 중심으로 한 집권층들은 실천승가회의 요구를 외면했다. 오히려 이것이 개혁세력의 결집을 가져온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11월 정기중앙종회에서 종헌종법개정안이 또 이월되자, 실천승가회는 본격적으로 의현 총무원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1994년 벽두부터 실천승가회는 퇴진운동을 위한 조직결성에 나섰다. 1월14일 실천승가회는 선우도량, 동국대석림동문회, 전국승가대학인연합 등 승가 4개 단체와 모임을 갖고 ‘범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 구성을 논의했다. 그러나 선우도량은 범종추 가입에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당시 선우도량은 ‘교육을 통한 의식개혁에서 시작되는 종단개혁’을 추구했다.
 
범종추 구성에 난항을 겪으면서 개혁운동이 혼선을 빚을 무렵인 1994년 1월 뜻하지 않게 ‘상무대 비리의혹’ 사건이 불거졌다. 종단개혁이 본격화된 것도 이 무렵이다.
 
실천승가회는 곧바로 성명을 발표하고 총무원장이 직접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종단 출재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종도들의 86.6%가 ‘의현 총무원장의 3선을 반대한다’는 의견도 얻어냈다. 이런 가운데 종단 안팎의 비판여론이 커지면서 부담을 느낀 의현 스님은 임기를 5개월이나 앞둔 1994년 3월 3선 강행을 추진했다. 실천승가회는 범종추 구성을 재논의했다. 이때까지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던 선우도량도 범종추 가입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3월23일 실천승가회와 선우도량, 동국대 석림회와 동문회, 중앙승가대 학생회, 전국승가대학인연합 등 승가단체가 중심이 된 범종추가 출범하고 마침내 의현 스님의 퇴진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의현 스님의 사퇴로 개혁종단이 출범했다. 그러나 개혁종단은 애초 실천승가회가 추진했던 개혁방향과 궤를 같이 하지 못했다. 종단 권력의 분산과 겸직금지, 사찰운영위원회 설립 등 제도적인 부분은 크게 개선됐지만 개혁입법 초기 실천승가회가 제시한 법안들이 상당부분 퇴보했다. 여기에 개혁종단 초기 실천승가회 등 개혁세력들이 종단의 중심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기존 세력들이 재집권한 것은 개혁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지적됐다.
 
그로부터 20년. 실천승가회는 현대한국불교사에서 민중불교운동을 계승한 승가운동 단체로 사회민주화와 종단개혁을 이끈 불교계 대표적인 진보단체로 인식돼 왔다. 2006년 사단법인 로터스월드를 설립해 캄보디아 등 국제구호에 나선 것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실천승가회 일부 스님들이 종권 진출에 앞장서고 기득권 세력들과 타협하거나 스스로 기득권화 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정치집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비판의 정당성은 지속적인 성찰과 반성에서 비롯된다. 끊임없이 샘솟으려는 노력이 없으면 썩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천승가회는 ‘대중의 삶에서 불교적 가르침을 실천하겠다’는 창립정신 회복이 절실한 시점에 서 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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